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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같은 정보/가족• 연애

조선 제14대 선조의 가족들

by 잡필러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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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3대 왕 명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11대 왕 중종의 서손하성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선조입니다. 선조는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 씨의 소생 덕흥대원군 이초의 셋째 아들입니다. 할아버지 중종에서 광해군까지 얽힌 가족사를 알아봅니다.

선조의 가계도

 

 

정비 의인왕후 박 씨와 계비 인목왕후 김 씨

선조는 1552년 탄신 해서 1608년에 승하했는데, 16세의 어린 나이인 1567년부터 1608년까지 40여 년 동안 재위 했습니다. 총 8명의 부인에게서 14남 11녀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정비 의인왕후 박 씨

번성부원군 박응순의 딸이며, 1555년에 태어나 15세인 1569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몸이 약해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중전으로 있으면서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를 효성을 다해 섬겼으며, 후궁의 소생들에게도 은애가 지극했다고 전해집니다. 덕과 예를 갖추었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1600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다. 능은 목릉이며 선조와 함께 묻혀 있습니다.

의인왕후릉
출처 : 문화재청, 의인왕후 목릉

 

계비 인목왕후 김 씨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이며 1584년에 태어났습니다.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습니다.
 
선조는 후궁 공빈 소생의 두 아들 임해군과 광해군을 비롯하여 14명의 왕자가 있어지만, 의인황후가 몸이 약해 후사 없이 죽은 관계로 정비 소생의 적통 왕자가 없었습니다.
 
조선전기에는 왕후가 승하하면 3년 뒤에 후궁을 왕비로 올리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따라서 후궁 공빈은 왕비 책봉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중종이 문정왕후를 외부에서 간택한 전례에 따라 김제남의 딸을 간택하여 인목왕후로 책봉하게 됩니다.
 

 

광해군의 보위를 잇게 도운 인목왕후

 
왕비 책봉의 꿈이 사라진 후궁 공빈은 물론 그의 소생 광해군은 본인보다 9세나 어린 새어머니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더 걱정스러운 일은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을 경우 후궁 소생인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 모자에게는 불행하게도 1606년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았고 이것이 장차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피를 부르는 비극의 서막이 됩니다. 소북파와 대북파로 갈라져 치열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소북파 :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고자하는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대신들    **대북파 : 광해군을 지지하고 따르는 정인홍 무리

 
1607년 10월 건강이 갑작스레 악화되어 병석에 누운 선조는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는 비망기를 내렸는데, 이는 어린 영창대군으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재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소북대신들은 그 내용을 숨겼으나 대세는 이미 광해군에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 비망기 :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는 문서

 
1608년 1월, 선조는 죽기 전 중신들을 모아놓고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립니다. 다급해진 소북파 대신들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고 수렴청정하라고 부추겼지만 선조의 유명을 중시한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으로 보위를 잇게 했습니다.

**선위 : 왕이 살아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 최고의 어른

임해군 제거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등 소북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됩니다. 이들은 광해군의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 선조의 첫째 왕자이자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을 을 제거합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얼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해 사신이 파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임해군은 문제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여긴 대북파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죽임을 당합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작 신원되었습니다.
 

'7서의 옥'과 영창대군의 피살

영창대군은 선조의 14명의 아들 중 유일한 적출이며 인목왕후의 소생입니다. 선조가 건강이 악화되기 전에는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까지 품었지만,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너무 어린 영창대군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당시 나라를 생각해 결국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리고 죽습니다.
 
영창대군이 자라면서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 파는 선조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대신들에게 내린 유교가 마음에 걸려 늘 영창대군을 눈에 가시로 여깁니다.
 
기회를 엿보던 대북파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1613년 소양강을 무대로 유흥을 즐기던 서양갑,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갇힌 '7서의 옥'이 발생했습니다. 대북파는 이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고, 이를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이 주도했다고 꾸몄습니다.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하는 한편 김제남은 사사시켰습니다. 이후 조야에서 끊임없이 영창대군을 구원해 달라는 상소가 이어지자 1614년 봄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황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됩니다. 이때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습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관작이 복구되었습니다.
 

 

폐서인 되어 경운궁에 유폐된 인목왕후

인목왕후는 당시 왕실 최고의 어른이자 법통으로는 군주인 광해군의 어머니였지만 영창대군이 사살된 후 둘은 실질적으로 원수관계가 됩니다.  광해군은 자신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고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킵니다. 인목대비는 경운궁에서 맏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참하고 가혹한 생활을 견디며 살아야 했습니다.

경운궁
경운궁(덕수궁)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에 대한 원한을 갚다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 같은 패륜 행위는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습니다. 1623년 3월 13일 이귀, 최명길 등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켰습니다. 거사의 명분은 폐모살제였습니다.

**廢母殺弟 :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

 
인목대비는 경운궁으로 직접 찾아와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고자 했던 능양군에게 절차에 따라 어보를 전달한 뒤 광해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간절히 간청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운명이 바뀐 두 사람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광해군은 왕위를 박탈당한 채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인목대비는 다시 왕실의 최고어른으로 복호 돼 대왕대비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창덕궁에 머물러 살던 인목대비는 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타자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1631년부터 설사와 복통, 고열등의 질병에 시달리다 1632년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후 선조와 의인왕후가 묻혀 있는 목릉에 함께 묻혔습니다.

인목황후 묘 목릉
출처 : 문화재청, 인목왕후 묘

 
 
인조의 위협 속의 정명공주
어머니 인목대비가 죽자 고명딸 정명공주는 인조의 살해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번 어머니의 은택을 받아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인목대비가 없는 현실에서 유일한 인조반정의 대의명분이 되는 정명공주를 살해하면 안 된다는 공신들의 비호 때문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행복한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조 시대의 세계 정세

** 중국에서는 명이 서서로 몰락하고 여진의 누루하치가 세력을 팽창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하고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 들이기 시작합니다.

**영국이 해양을 제패하고 해가 지지 않는 세력을 펼치고,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인도에 대한 침탈을 강화합니다.

**문학적으로 세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전성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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