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1월 11일부터 방영 중인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최수종을 비롯한 탄탄한 연기진과 기획력이 어우러져 인기가 대단합니다. 10회 만에 시청률 10%를 기록하면서 'KBS 사극'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드라마의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알고 시청한다면 그 재미가 더할 것입니다.
고려 거란의 3차례 전쟁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중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916년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나라를 건국하였는데 이가 요나라(거란)입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고려와 거란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교류가 빈번하였는데, 이 두 나라가 서로 앙숙이 된 계기는 926년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사건 때문입니다. 송나라와 대치하고 있던 요나라는 고려와 잘 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발해 상류 계층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운 고려는 거란을 금수지국으로 여기며 발해와 옛 고구려 땅 수복을 위한 북진 정책을 고수하게 됩니다.
제1차 고려 거란 전쟁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요를 위협한다고 여기고 요나라 동경유수 소손녕이 약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합니다. 이것이 제1차 고려 거란 전쟁입니다. 고려 성종 12년 993년의 일입니다.
1차 고려 거란 전쟁을 일으킨 요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소손녕은 고구려의 땅이 요나라의 것인데 고려가 북진정책으로 요의 땅을 빼앗으려 해서 침공한 것이라는 침공 이유를 밝히고, 화친의 조건으로 서경 이북 지역을 요에게 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땅을 내어주고 화친을 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하여 서경 이북 땅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서희와 이지백 등이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버티는 동안 요의 안융진 공격의 실패를 계기로 서로 화친을 위한 회담을 갖게 됩니다. 이때 서희의 지혜와 담판으로 요를 설득해 오히려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홍화진, 통주,구주,곽주, 용주, 철주 등의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하게 됩니다.
1차 고려 거란 전쟁의 결과 |
**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고 송과의 관계를 청산할 것을 약속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함 **고려는 요의 힘을 업고 동여진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설치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하는 실리를 얻게 됨 |
그러나 고려는 요와의 약조를 지키지 않고 송나라와 계속 교류를 하면서 친송 정책을 유지합니다. 요나라도 나중에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를 관리하기 좋은 위치로 그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제2차 고려 거란 전쟁의 실질적 원인이 됩니다.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고려 현종1년 1010년 11월 요나라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합니다. 요 성종은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는데 이 것이 제2차 고려 거란 전쟁입니다.
1차 고려 거란 전쟁의 말미에도 밝혔듯이 거란이 침략한 진짜 이유는 비공식적인 고려와 송과의 교류룰 완전히 차단하고 요와의 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뒤늦게 강동 6주의 지리적 중요성을 깨닫고 되찾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강조의 난 |
제7대 임금 목종은 18세로 즉위하여 친모인 헌애 왕후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헌애 왕후는 승려 출신의 김치양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정치를 맡깁니다. 김치양의 권력 남용이 심해지자 목종이 김치양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헌애 왕후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심지어 헌애왕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 아들을 출산하게 되는데 자기의 아들을 즉위시키려고 목종과 후계자인 대량원군을 사살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본 강조가 김치양 일파를 몰아내는 한편 목종까지 폐위시킨 후 대량원군을 옹립한 뒤 권력을 장악한 정변입니다. |
강조의 사망과 강감찬의 등장
거란군은 강동6주 중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지만 성주인 양규의 항전으로 함락에 실패합니다. 그사이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에 임명하고 30만 대군으로 통주에서 싸우게 했으나 강조는 크게 패하고 사로잡혀 죽게 됩니다.
거란은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은 후 개경까지 함락시킵니다.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나주로 피난을 가게 되고 고려 조정은 항복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장군이 강감찬입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요나라 군대와 싸우는 동안 함락되지 않고 있던 홍화진의 양규와 김숙홍도 거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결국 열세인 고려군은 양규와 김숙홍이 전사하면서 성을 빼앗기게 됩니다.
개경함락을 위해 홍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관리하지 못하고 내려온 거란군에 병참선이 차단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를 알아차린 고려는 하공진을 보내 화의를 청하게 됩니다. 현종이 요나라에 친조 할 것과 강동 6주를 요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화친이 이루어져 성종은 요로 돌아가고 전쟁은 끝이 납니다.
제2차 고려 거란 전쟁의 결과 |
** 고려 현종은 요에 친조를 할 것을 약조함 **강동6주를 요에 돌려 줄 것을 약조함 |
제3차 고려 거란 전쟁
제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고려가 약속한 두가지 모두 이행하지 않자 요는 사신을 보내 현종의 친조와 강동 6주의 조속한 반환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고 오히려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1014년에는 송나라와 다시 교류를 합니다. 요의 침략에 대비해 현종은 꾸준히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는 등 국력배양에 힘을 다합니다.
드디어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합니다. 이것이 제3차 고려 거란 전쟁입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여 20만 대군으로 거란의 침공에 맞서게 됩니다.
요나라 군대가 홍화진 쪽으로 쳐들어 올 것을 예상한 고려군은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을 시키는 한편,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홍화진 동쪽의 둑을 막았다가 요나라군이 이르자 일시에 물을 내려보내 혼비백산하게 만든 뒤 크게 무찌르게 됩니다.
거란군의 소배압은 큰 피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수습하여 개경으로 진격을 합니다. 그러나 개경으로 가던 도중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게 되고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청야전술 :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을 적군 이동로에서 제거해 지치게 만드는 전술
거란군은 1019년 정월 개경 근처 신은현에 도착했으나 개경함락이 무리임을 깨닫고 요로 퇴각을 하게 됩니다. 강감찬은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거란군 10만 명 중 생존자는 겨우 2천여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귀주대첩 : 1019년 3월 10일(음력 2월 1일) , 고려군 20만 명 이상, 요나라군 10만 명 이상의 대 병력이 귀주(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의 평야 한복판에서 맞붙은 총력전 |
3차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전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거란과 다시 사대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은 평화를 유지하게 되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도 맺습니다. 양국 간의 문물 교류도 활발해지게 됩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고려는 북쪽 국경과 수도 개경에 대한 방어책을 꾸준히 강화해 나갑니다. 1029년에 거란과의 2차 전쟁에서 함락된 수도 개경의 외곽에 나성을 축조했습니다. 또 거란과 여진 등 북방 민족의 압록강 연안에 대한 침입을 막기 위해 덕종(1031~1034 재위) 2년에 동해 도련포(함경남도 함주 부근)에서 압록강을 잇는 천리장성을 짓기 시작하여 정종 10년(1034~1046 재위) 1044년에 완공하였습니다.
이상으로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계기로 이 전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살펴 봤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려 거란의 3차례 전쟁 중 2차와 3차 전쟁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 내용을 알고 드라마를 시청하면 그 재미와 의미가 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재밌게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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